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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라이브 선샤인

[다이마루] 비를 긋다.

비를 긋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햇볕이 우치우라의 바다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을 터였다. 정류장에서 내려 교정까지 걸어가는 길. 불어오는 바닷내음 섞인 바람에 상냥한 햇살의 포근한 기운이 뺨을 어루만져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휴대폰으로 보았던 오늘의 날씨도 그렇다. 구름에 가려진 해와 함께 일부 흐림이라는 설명 밑에 쓰여 있는 강수확률은 30%밖에 되지 않았건만.

 

이 날은, 비가 내렸다.

 

*

 

여느 때처럼 연습을 마치고 모두가 돌아간 시간. 다이아는 그들과 같이 돌아가지 않고 아까 못 다하고 나온 서류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잠시 학생회에 들러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딱히 재미가 들린 게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서류가 아니어서 계속 해치우다보니 어느새 세상을 물들이던 노란색의 노을이 어둑한 산 속 너머로 몸을 숨긴 것도 몰랐으리라.

 

겨우 일단락을 마친 다이아는 삐걱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다가가고서는 낮은 신음을 내었다.

 

. 많이 어두워졌네요.”

 

어느새 검은색의 구름이 잔뜩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그저 시간이 지나 해가 떨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서두르는 게 아닌. 언제나의 익숙한 손놀림을 이용해 빠릿하게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커튼을 치고, 학생회실을 나오기 전 걸려있는 벽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

 

고개를 갸웃. 그 움직임에 따라 어깨에 걸려 있던 검은색의 머릿결이 스르르 움직이며 곱게 흘러내린다. 다이아는 개의치 않는 듯 머리를 뒤로 넘기는 행위 대신에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무기질적인 액정의 빛 속에서 화면 가장 중앙에 떠있는 하얀색의 숫자를 본 다이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네요.

 

보통 학생회실의 문을 잠그는 시간은 5시 즈음. 아침에 알람을 맞춰놓고 며칠을 일어나다보면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에 의거하듯,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버린 다이아의 일처리 능력은 저도 모르게 5시 조금 전에 일을 전부 마친다는 바이오리듬의 하나로 형성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바이오리듬이라는 불안정한 요소는 너무 우유부단한 탓에 주변 환경에 자주 휩쓸리기 마련이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완전히 신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이아는 다시금 체감했다.

 

그래도 이미 정리한 것들을 다시 꺼내놓아 책상에 늘어놓기는 거북함이 든다. 하는 수 없지.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쉰다. 아무런 일도 없이 1시간 일찍 돌아가는 건 이례적이지만, 다이아는 망설임 없이 학생회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반대로 지금 돌아가게 되는 건 무슨 계시일지도 모른다.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은 언제나 냉정하게 사리를 판단하는 다이아의 마음에 침착하지 못한 불안정함을 가져다주기엔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상은, 걸음을 재촉하도록 하죠. 뭔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다이아는 얼른 학생회실을 걸어 잠그고는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복도에 평소보다 빠른 템포의 발걸음을 새기며 교정을 뒤로했다.

 

발걸음을 빨리 한다고 버스의 일정표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1분 정도의 오차야 있겠지만 운전기사들도 프로. 다이아가 평소 끝나는 시간에 맞춰 느긋함이 묻어나는 일정한 속도로 발을 옮기면 그곳엔 언제나 버스가 오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본의가 아닌 빠른 귀가. 다이아도 버스 일정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저 멀리 버스정류장이 시야에 담길 때 즈음, 다이아는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버스 일정표를 보고 아차했다. 뛰지는 않고, 종종걸음으로 겨우 정류장에 도착한 다이아는 가장 먼저 버스 배차 시간을 확인했다.

 

익숙하지 않은 짓은 할 게 못 되네요.”

 

휴대폰을 꺼내들어 시간을 확인, 대조한 다이아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해진 일정은 빈틈없이 수행해내는 게 우치우라 버스 기사의 자랑거리라고 무방하다. 다이아도 그 점에 대해선 전적으로 신뢰를 주고 있다. 그렇기에 괜히 이 일정표가 얄밉게만 느껴졌다.

 

“5분 전 출발에, 다음 버스는 1시간 뒤인가요.”

 

이럴 거면 다시 돌아가서 일을 더 하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아까 접었던 마음을 다시 꺼내려니 솔직하게 말해 귀찮았다. 이미 깔끔하게 정리해두었고, 웬만한 일도 마무리 지었기에 돌아가도 크게 할 일은 없었다. 내일을 위한 준비 정도일까.

 

다이아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이제는 여러 군데 색이 바래진 버스정류장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의식하고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엔 분명 더 하얀색에 가까웠을 테지. 이제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썩은 나뭇잎. 그리고 잎이 싹튼 덩굴로 덮인 푸른색의 지붕도 예전에는 새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가끔씩 어머니와 루비를 양손에 품고 이따금 누마즈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 언제나 지나치던 정류장을 이렇게 지긋이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제대로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시간은 흐름을 증명하고 있다.

 

자신은, 잘 해내고 있는 걸까.

 

학생회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무리도 하지만, 똑바로 자신을 봐주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예전보다 유순해진 덕에 솔직한 말로 도움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루비는 스쿨 아이돌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훨씬 듬직해졌다. 이제는 언니로서 뒷바라지를 하는 게 아닌, 곁에 서서 함께 보폭을 맞추며 격려를 해주는 사이로 성장, 발전했다.

 

선후배 관계는 어떨까.

 

문득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상에 맺히면서 꽃냄새가 콧등을 스쳤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다이아의 몸은 까닭도 모른 채 그저 간질거렸다. 다른 후배도 많을 텐데, 봄의 요정이 사람으로 변해버린 듯한 귀여운 그 아이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다이아는 내심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 아이가 자신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을 때면 언제나 눈으로 좇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식하는 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반대편에서는 언제부터 의식하게 된 건지 함께 온 세월을 되풀어나가며 올라가고 있다.

 

쿠로사와 루비와 쿠니키다 하나마루는 중학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모양이지만 다이아는 그 시절에 쿠니키다 하나마루라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루비가 방긋 웃는 날로 귀가할 때면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고 물어보고, 루비는 매번 루비의 친구가하고 입을 떼었던 것이다. 인식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귀퉁이 한켠에 몰래 고마움을 담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그것뿐인 인연이었다.

 

얼굴을 처음 보게 된 건 루비의 중학교 졸업식. 식을 마치고 멀리서 돌아오는 두 사람. 그런 와중에 그녀의 모습은 눈앞에 있는 것같이 다이아에게 다가와 있었다.

 

어깨를 살며시 덮은 연갈색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흩날릴 때마다 인공적인 샴푸향이 아닌, 자연의 향기가 몸을 감싸고돈다. 순수함이 한가득 차있는 호박색 눈망울이 반짝이며 다이아를 눈동자에 담으려는 듯 올려다보았던 걸 기억한다.

 

루비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였었지.

 

제 딴엔 유들유들하게 다가오려는 셈이었겠지만, 옅은 분홍색으로 상기된 뺨과 조금 살집이 붙어 말랑말랑해 보이는 애기 같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은 딱딱하고 얼음장처럼 찬 인상의 다이아에게 노력해서 다가가려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작은 노력가에게. 다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앞서서 호감을 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루비는 하나마루를 집에 초대했다. 너무 많은 시간 함께 있던 탓에 어디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하는지. 이젠 언제가 첫 방문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무뎌진 감각.

 

분명.”

 

반추해보려 눈을 감았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 하고 머리를 살짝 때리는 차가운 감촉에 다이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하늘에서 내려온 물방울. 자각하지 못하고 열기를 띤 뺨에 내려온 차가운 물기에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린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이거였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붕이 있는 정류장 건물로 들어선 다이아는 아직 열이 덜 식은 뺨에 서늘한 양 손을 갖다 대었다. 비가 온 것도 조금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자신이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이렇게나 뺨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훨씬 당혹했다.

 

어째서 하나마루 양인 건지. 선후배관계에 대해 생각하려면 1학년의 요시코부터 시작해 치카와 요우, 리코도 있었을 터이다. 특정 인물만을 깊게 생각하며 얼굴이 빨개진 자신을 애써 부정하며 도리질을 친다.

 

이래선. 이래선 마치.

 

사랑하는 소녀 같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마음속 상자에서 말을 하나씩 꺼내어 입에 담자 열기가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친구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게 허락 될 리가 없다. 애초에 이 감정이 정말로 사랑인지 아닌지, 본인도 판단이 서지 않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다이아는 방향을 바꾸어 생각하기로 했다.

 

하나마루를 떠올려서 열이 오른 게 아니라, 열이 나는 데 하나마루를 떠올렸다. 한 때의 열기를 사랑이라 생각하는 건 아직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리라. 그렇게 단정 지으니 마음이 한층 편해진 것 같았다.

 

찰나의 감정을 굳게 믿어버리는 건 어린애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잠시 머리를 차갑게 하자. 최근엔 스쿨 아이돌이니, 학생회장 업무니 바쁜 일상을 달려온 다이아였다. 예전엔 이따금 집에서 사색에 잠기며 달을 올려다보았지만, 요즘에는 많이 피곤한 건지 푹신푹신한 이불 위에 몸을 누이면 곧장 수마에게 꿈나라로 끌려가곤 하는 매일이었다.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겠지.

 

이번에야말로 눈을 감는다. 날이 선 것처럼 예리해진 감각 속에서 서늘한 안개가 피부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비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비가 오고 땅이 젖으면 올라오는, 물기를 머금은 공기를 좋아한다. 빗물이 찰박찰박 땅에 웅덩이를 만들어내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자니 그 사이에 다급히 땅을 박차면서 물이 튀기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대기 중에 흘러들어오는, 어디선가 자주 맡아본 꽃향기가 희미하게 코를 간질였다.

 

살며시 눈을 뜨자,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게 한 눈에 보였다. 아직 거리가 먼데다 안개까지 끼어있는 형국임에도.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몇 번이고 쫓았던 그 아이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다이아도 이해하지 못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이아는 한 걸음 발을 내딛어 지붕 위치가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다가섰다.

 

하나마루.”

 

조용하게 읊조린 이름에,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빗소리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만개해있었다. 그것만으로. 마음속으로 저도 몰래 몇 번이나 되뇌었던 이름에 아름다운 봄의 색채가 입혀진 것만 같았다.

 

다이아 씨!”

 

책가방을 머리 위에 올리고 왔지만 그래도 궂은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다행히 1학년의 하복은 민소매이기에 젖는 면적은 덜했지만, 그래도 우산이 없다면 이제나 저제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건 똑같다.

 

하나마루가 정류장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이아는 잠시 숨을 그쳤다. 찰나의 시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대량의 살색. 비에 젖은 꽃잎이 내는 아찔하게 코를 찌르는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고개를 돌리는 건 실례라 생각하여 다이아는 하나마루의 눈만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사람의 눈이라는 건, 보려고 하는 것만 볼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진 않았다.

 

머리의 물기를 털기 위해 양손을 올린 하나마루의 민소매 안쪽이 빈틈투성이였다. 뽀얀 겨드랑이 아래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 하얀색의 속옷이 야릇하고 위험하다. 다이아는 어서 눈 돌릴 곳을 찾았다. 상의의 노란색 리본 아래로 꽃무늬 자수가 노골적으로 비쳤다.

 

파렴치, 라는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이 순진무구한 소녀는 분명 아무것도 모른 채일 테지. 사람에게 길들여진 소동물마냥 무방비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야한 의미를 갖다 붙이는 건 아무리 봐도 자신 쪽이었다. 최대한 머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내적 타협을 한 다이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평정심으로 가장하고 말했다.

 

아까 돌아간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아. 마루, 도서관에 커튼을 치는 걸 깜빡해서. 커튼만 치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재미있는 책을 발견해버렸지 뭐에요. 혼자 돌아갈까봐 조금 쓸쓸했는데 다이아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에헤헤, 하고 멋쩍게 웃으며 혀를 내미는 하나마루. 늦은 이유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너무나도 이 아이답고. 그리고 너무나도 귀엽다. 필히 발견한 책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딱 한 장만, 하고 첫 페이지를 넘겼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첫 문장. 첫 단락을 읽고 이 아이는 단숨에 저쪽 세계에 빠져들었으리라.

 

스쿨 아이돌 활동도, 도서위원도. 좋아하는 일에 관해서는 주위가 안 보일 정도로 몰두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 모습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언제나 안절부절 못하는 건 다이아 쪽이지만. 그래도 시야 안에서 보고 있을 때면, 행복해질 정도로 열심히 하는 모습 또한 보기에 좋았다.

 

머리는 냉정하게 있자고 생각하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가슴이 자꾸만 소리를 크게 올렸다. 저도 차암. 왜 이러는 건지요. 단순한, 조금 친한, 함께 부활동을 하는 후배일 뿐이다. 그런 마음을 품으려는 생각도 없다. 만일 있어도 이런 못된 마음을 가지고 이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면 선후배 관계마저 부서져버리지 않을까.

 

보이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를 말려주려고 뻗었던 손을 슬그머니 뒤로 무르고는 한 발자국 물러선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쿠로사와 가문의 안에서 언제나 자신의 마음은 뒷전에 머물러있었다. 루비처럼 강하지 못했기에 선택한다는 생각은 아예 가지지도 못했다. 마음 위에 쌓인 가문의 무거운 그림자에 짓눌릴 때마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바꾸려는 시도도 하지 못한 그 얼굴은 뭐든 포기해버린 것처럼 그저 웃고 있었다. 부정하지만 혹시나 남아있을 흑심을 품고 이 아이에게 닿으면 관계가 부서질 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내린 비에 감성적이 된 거겠지. 단순히 지나가는 비에 의한 변덕이다. 혹은 진심이라 할지라도. 선후배 관계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웃어보이자. 자연스럽게. 여느 때처럼 늠름한 선배로 계속해서 지내는 거야. 그렇게 결심했을 때였다.

 

다이아 씨!”

 

다이아의 두 발 사이에 쑤욱 들어오는 하나마루의 한쪽 발. 어떻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깜짝 놀라 뒤로 빼려는 다이아의 한쪽 손을 붙잡고, 하나마루는 다이아의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올린 뒤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하나마루의 눈에 비친 다이아의 얼굴. 세상 무엇보다도 괴로운 걸 억지로 감내하려는 듯한 씁쓸한 웃음에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발이 움직였다.

 

어디 아프신 건가요?! 감기?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머리가 어질하다거나 그렇담 아직 초기증세라 열이 안 올라온 걸지도 몰라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하나마루를 내려다보는 다이아. 주변이 고요해졌다.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빗소리가 멎었다. 빠르게 뜀박질하던 심장도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다. 차갑게 식은 머리에서 신호를 내렸다. 이 아이는. 하나마루는, 이런 사람이라고. 걱정하는 일에도 전력을 다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

 

다이아가 봐온 하나마루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함께 머리를 모아 생각해주면서, 스스로의 처신에 대해서도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해왔다.

 

아픈 게 아니라면 뭔가 곤란하다거나. 힘든 일이 있는 건가요? 그렇담 마루에게 상담해주세요. 그렇게 믿음직스럽진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다이아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보기 싫어요!”

 

하나마루 씨도 참. 푸흣,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갖고 있는 하나마루에게는 어째선지 질투가 나지 않았다. 굳이 쫓아가고 싶다는 존경의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마루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존중한다.

 

자신과는 정반대인 이 사람에게 이끌리는 건, 벽이 쳐져 있는 듯한 그런 깍듯한 감정이 아니다. 부정해도, 부정해도, 자꾸만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흐릿한 감정은 하나마루를 만나 점점 형체를 확실히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정말로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심지가 강한 하나마루 씨는, 제가 말해도 선후배 관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고백 방식은 하나마루 씨의 상냥함에 기대는 것과 같은 일이에요.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정한 뒤 고백하게 된다면 고지식한 다이아는 친구의 동생에게 흑심을 품었다는 배덕감을 견딜 수 없을 테지. 스스로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고지식한 자신을 이제 와 바꾸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잘 해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지금의 자신을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자신이 먼저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만들자. 다시는 하나마루의 일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 자신이 괴로워하면 같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이 아이에게 나쁜 감정을 옮기지 말자.

 

다이아는 이마를 맞대고 있는 하나마루를 슬쩍 밀어내었다.

 

다이아 씨?”

걱정하게 해서 죄송해요. 잠시 배가 아파서.”

!? 배가 아팠던 거라면 마루, 좋은 방법을 알고 있어요! 절에서 배운 민간요법이지라!”

후후, 지금은 괜찮아졌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

 

겨우 표정을 풀고 웃어준 하나마루, 그녀의 뒤로 하늘에서부터 이어지는 작은 빛이 지면을 내리쬐고 있었다. 다이아는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강수확률이 30%밖에 되지 않았건만. 그래도 비가 내리게 된 건 이렇게 하나마루와 만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하다. 답지 않게 감성적으로 만들어 그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내어 흔들리는 마음을 확실히 해준 건,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지나가는 비였다.

 

비가 그치는 것 같네요.”

, 정말인가요?!”

 

, 뒤를 돌아 하늘을 바라다보는 하나마루. 뒤에서도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게 보였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도중, 문득 아직 손에 따뜻한 감촉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다이아가 눈을 슬쩍 깔았다.

 

아까 잡았던 손이, 여전히 이어져있었다. 아직 비어 있는 다른 쪽 손을 하나마루의 머리 위에 얌전히 올렸다. 다이아는 드문드문 곱게 걸려 있는 방울꽃을 체온으로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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