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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라이브 IF

[팬픽] 러브라이브! IF ~만일 학교가 남녀 공학이 된다면~ 3

3장, 퍼스트 라이브

 

아직 열이 덜 오른 햇빛과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바람에 나는 으슬으슬해진 몸을 움츠렸다. 6시도 안 되어 부회장에게 전화가 와선, 강제적으로 일으켜져 신사로 나온 나는 싸리로 엮은 빗자루를 들고 텅 빈 신사를 청소중이다.

역시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의 왕래는 거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없었다.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가 괜히 크게 들린다. 신사의 낮의 모습만 봐온 나는 신사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차가운 공기가 폐에 흘러들어 상쾌한 기분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편안한 정적에 몸을 맡겨, 잠시 서 있었더니 뒤에서 콩, 하고 누군가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지금 농땡이 피우는 기가?”

“너무 운치가 있길래 그만 명상에 빠져들었어요.”

“아침 신사의 풍경은 이런 아르바이트라도 아니면 보기가 힘드니께. 확실히 독점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구마. 그치만 농땡이는 안 된대이? 뭐, 슬슬 그 아들이 올 때기도 하구, 조용한 신사에서 명상하는 건 어차피 끝이네.”

“그 아들?”

되묻기가 무섭게, 곧바로 신사의 뒤쪽 계단에서 삑─ 소리가 들려왔다. 체육시간에 하도 들어 귀에 익숙해진 호루라기 소리다.

“함 볼래?”

호루라기 소리가 난 방향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열기가 섞인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만으로 나는 단번에 계단 쪽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며 리듬을 타는 소리. 틀린 점을 지적해주고, 잘한 점은 칭찬하며 서로를 보완해주고, 격려하는 목소리. 힘찬 목소리 사이에 간간히 들리는 거친 호흡까지. 저 세 사람은, 나름 진지하게 스쿨 아이돌 활동을 생각해주고 있다.

“지금 가면 방해만 될 것 같으니까, 연습이 끝나면 가볼게요.”

“응, 그래 하는 게 좋겠네. 자, 그럼 우리도 청소 힘내보재이!”

약 40분 정도, 몇 번의 휴식을 거치고 겨우 연습 소리가 끊겼다. 마침 신사의 청소도 시간에 맞춰 거의 끝났다.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자 부회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부지 같구마.”

그거 할아버지와 저한테 엄청나게 실례인데요.

“머, 신사 청소도 거의 끝났구. 나머지는 내가 해둘 테니 인사 하고 오그라.”

“네, 그럴게요.”

창고에 빗자루를 집어넣고 계단 쪽을 향하자, 코우사카 선배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왔다.

“니시키노 양~~~! 마키쨩~~~~!”

응? 니시키노가 왔다고? 니시키노가 아침부터 신사엔 무슨 일로 온 거지?

“큰 소리로 부르지 마!”

“응? 어째서?”

“창피하기 때문이라고!”

뭐, 보통은 그렇지. 그래도 지금 시간대는 인적이 드물어 부끄러움도 덜 하겠지만. 아니면 이름을 불리는 게 부끄러운 걸지도 모른다. 아무렴 니시키노니까.

“선배들, 수고하셨어요.”

“오, 에루 군! 좋은 아침!”

활기찬 웃음 덕에 나도 같이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지…려고 했지만, 옆에서 윽, 하고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짓는 니시키노 덕에 그런 마음이 다 날아가 버렸다. 이봐, 내가 어색한 건 알지만 그래도 같은 반 친구에게 그런 표정 짓는 건 너무하잖아. 난 너한테 초면부터 스토커라는 소리를 듣고, 두 번째 얼굴을 대면했을 땐 따귀까지 맞았다구. 그 따귀 때문에 니시키노는 내가 불편한 거겠지만.

“연습 수고하셨어요.”

“응, 고마워! 참! 마키쨩! 그 곡, 셋이서 불러봤으니까 들어봐.”

“하아? 어째서?”

“그치만, 마키쨩이 만들어준 곡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아니아니, 눈에 띄게 당황해놓고 발뺌을 하면 씨알도 안 먹힌다고. 그것보다 정말로 만들어줬구나. 역시 코우사카 선배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할까.

우미선배도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하고 솔직하지 못한 니시키노에게 핀잔을 주었다.

음. 만들어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노래라는 게 이렇게 단시간에 완성되는 거였나? 그게 아니면 역시 니시키노는 노래 쪽에 관련해선 뛰어난 천재인 건가. 어느 쪽이든 우리 스쿨 아이돌만의 오리지널 곡이 생겼다는 건 충분히 기쁘고, 축하할만한 일이다. 듣기 익숙해진 다른 스쿨 아이돌의 곡보다는 새롭게 귀를 자극하는 노래가 훨씬 좋은 게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작스레 코우사카 선배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크큿.”

니시키노는 코우사카 선배의 수상한 웃음을 눈치 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가오~!”하고 동물 흉내를 내며 니시키노에게 달라붙은 코우사카 선배. 니시키노는 겁에 질려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으, 으읏, 하아!? 뭘 하는 거야!?”

“우히히히히힛.”

수상함의 강도를 높여가는 코우사카 선배. 니시키노의 귀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간다. 이쯤 되면 경찰에 신고해도 문제 없지 않나? 문제 없겠지?

“싫어어어어어엇─!”

니시키노가 소리를 지르고 내가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코우사카 선배가 니시키노의 귓속에 살짝 이어폰을 꽂아 넣었다.

“에?”

“좋았어! 작전 성공!”

“…….”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더 잘 들리도록 이어폰과 귀를 살며시 누르는 니시키노. 구경하던 내 옆에도 어느새 미나미 선배와 소노다 선배가 가까이 와 있었다.

“자, 에루 군도~!”

“함께 들어주세요!”

두 사람은 나를 끌고 니시키노 옆으로 이동하더니, 나머지 한 쪽의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았다. 코우사카 선배가 웃는 걸 보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네. 나야 듣고 싶긴 했지만, 라이브 때 보는 편이 더 놀랄 거라 생각해서 참고 있었는데.

“제법 잘 불렀다고 생각하거든. 틀게?”

“μ‘s!”

“Music!”

『START!!』

 

Love Live!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나와 부회장은 함께 등굣길을 걸었다. 저 멀리에서 코우사카 선배 일행이 앞서 가고 있었지만 사이 좋아 보이는 세 사람 사이에 끼는 건 분위기를 깨는 거겠지. 나와 부회장은 느긋하게 걸으며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이브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머, 얼마 안 남았다고 할까, 바로 내일이네.”

“이 상태면 분명 성공하겠죠?”

이때까지 세 사람이 얼마나 연습해온지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 라이브가 실패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선배들은 누구보다도 좋은 무대를 보여줄 게 틀림없다.

“그걸 정하는 건 우리들이 아니대이. 저 아들의 강한 의지가 앞으로 가는 길을 비쳐줄 기다. 천천히 지켜봐주믄 된대이.”

“이미 이사장님께서 결론을 내버려서 학생회 임원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테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해요.”

“에릿치는 이제 스쿨 아이돌을 보지 않고, 어떻게든 학생회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오토노키의 존속을 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께 에루 군도 그쪽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겄나. 에릿치한테 학생회 활동을 소홀히 한다고 혼나도 모른대이?”

“둘 다 전력을 다할 셈이에요.”

“그럼 괜찮지만, 하고 말하고 싶지만, 저 아들이 하는 스쿨 아이돌 활동은 에릿치 입장에선 필요 없는 활동이고, 리스크도 너무 크대이. 학교 존속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에릿치다. 스쿨 아이돌이 실패한 것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거겠제. 게다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개념이 남아있제. 그래서 저 활동을 쉽사리 인정할 수 없는 기라. 그런데 에릿치는 동시에 이렇게도 말했대이. ‘남은 2년 동안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지 잘 생각해보라.’고.”

“선배들이 노력하는 건, 분명 학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과 후배, 더 나아가서 아마 자신들을 위해서인 것 같았어요.”

코우사카 선배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볼 때, 다른 아이돌의 안무를 볼 때, 니시키노가 만든 노래를 들을 때, 그 모습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노력하고, 노력하면서도 전력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일 테지.

“에릿치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기다. 게다가 그 아들은 오토노키의 학생. 학생을 위하는 에릿치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싶은 일에 전력으로 도전하는 학생을 막을 순 없는 기라. 설령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머, 막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하고 부회장이 매듭을 지었다.

“실패했을 때에 학교도, 학생들도 전부 끝난대이. 그런 위험 부담이 있는 스쿨 아이돌 활동을, 언제나 자신보다 타인을 생각하는 에릿치는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구. 그러니께 에루 군이 아무리 학생회 활동도 전력으로 해도, 스쿨 아이돌 활동도 전력으로 도와준다믄 에릿치한테 미움 받을 기다.”

그건 조금 무섭다. 미움 받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내 궁금증은, 앞에 가던 코우사카 선배들이 멈추는 것과 함께 걸렸다. 나와 부회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고정했다.

“너희들, 혹시 스쿨 아이돌을 하고 있다는….”

의아하게 물어보는 3학년 선배. 미나미 선배는 자신들을 알아본 게 기뻤는지 티가 날 정도의 높은 톤으로 대답했다.

“아, 네! μ‘s 라는 그룹이에요!”

“μ‘s? 아~ 비누….”

“─아닙니다.”

풉, 하고 나와 부회장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누라니, 그 천연수제 비누인가. 확실히 그것도 뮤즈였지. 뭐,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우리 학교에 한정해서겠지만, 이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이 기쁨은, 노력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꿀 같은 과일일 것이다.

“아, 맞다! 우리 여동생이 인터넷에서 너희들을 봤다고 했어.”

“정말인가요!?”

“내일 라이브하는 거지?”

“네! 방과 후에!”

내가 능글맞게 웃으며 부회장을 쳐다보자, 부회장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부회장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귀에 걸려 있는 입꼬리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한테는 회장에게 혼날 거라 말했으면서도, 부회장은 코우사카 선배들의 스쿨 아이돌 활동을 뒤에서 착실히 서포트 해준다. 분명,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겠지.

“어떤 식으로 하는 거야? 조금 춤춰보지 않을래?”

“에? 여기서 말인가요?”

“조금만이라도 괜찮으니까!”

기대로 들뜬 3학년 선배들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미나미 선배의 목소리에서는 당황함이 묻어났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무슨 일인지 싶어 흘끔흘끔 곁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소노다 선배는 아예 안색이 파랗게 변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건가 싶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괜찮을라나, 저거.

이런 와중에 코우사카 선배가 수상한 웃음을 흘렸다.

“우후후후후후후훗! 좋지요! 만약 라이브에 와주신다면 여기서 조금만 보여드릴게요~? 손님에게만 특별히!”

장사를 시작했다?! 거기에 미나미 선배도 다시 침착해졌는지 여유로운 웃음까지 띠우곤 덧붙였다.

“친구 분을 데려오신다면 추가로 조금 더!”

“정말?”

“갈게, 갈게!”

“매번 감사합니닷~!”

의외로 코우사카 선배가 장사 수완이 좋았다. 미나미 선배는 원래 저런 거 잘할 것 같은 이미지인데. 그리고 나와 부회장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미나미 선배와 코우사카 선배가 선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동안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쏜살같이 교내로 들어간 것을. 두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고 나란히 서서 춤 출 준비를 마쳤다.

“그럼 앞부분만!”

시작하기 직전, 3학년 선배가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어라? 다른 한 사람은?”

그제야 코우사카 선배와 미나미 선배는 옆을 돌아보고 소노다 선배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챘다. 아니아니, 너무 늦었다고요.

“…어라?”

결국 춤추는 건 다음으로 기약한 두 사람은 얼른 소노다 선배를 찾으러 교내로 들어갔다. 장사는 실패, 3학년 선배들도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소노다 선배, 여기서 춤을 추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나빠졌어요.”

“응, 보고 있었대이. 아마 사람 앞에서 춤추는 게 서투른 게 아닐까? 내일이 당장 라이브인데 쪼금 걱정되는구마.”

부회장의 말대로. 내일까지 소노다 선배의 낯가림을 고치지 않으면 아마, 가 아니라 100% 큰일 나겠지. 그건 그렇고 모든지 쉽게쉽게 해낼 것 같은 소노다 선배가 낯가림이란 말이지….

싹이 튼 불안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걸음을 뗐다.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부회장, 저는 여기서.”

“응. 이따 보재이.”

가볍게 부회장과 인사를 나누고, 흘러가는 시간을 쫓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초조해졌다. 일단 방과 후까지는 공부에만 집중하자.

 

“오늘은 미리 정해두었던 팜플렛을 본격적으로 만들고, 내일 있을 연설에 대해 정해보려고 해. 미리 강당에 세팅도 해둬야 하니까 빠르게 끝내자. 강당 세팅은 미리 시간을 맞춰서 반장들과 방송부 아이들을 불러놨거든.”

회장이 의욕을 앞세워 책상을 탁, 치면서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의욕이 넘칠 만큼 일이 쌓여 있는 건 아니다. 이벤트 전에 올라오는 서류는 거의 학생들에게서 올라온 게 아니라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일단 한 번씩 훑어보라고 주는 거라 딱히 우리들이 뭔가 해야 되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연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봐야 난 무대 위에 올라가 서 있는 역할. 연설은 회장이 맡을 테니까 정말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직접적인 건 없다.

미리 물을 올려둔 포트가 끓기 시작해, 나는 찻잔에 녹차를 따르고 테이블에 놓았다.

“긴 연설은 학생들이 싫어하겠죠?”

“머, 대부분 그렇겠제. 근디 이건 신입생 환영회라는 이름의 오리엔테이션이니께, 학교에 대해 모르는 부분은 우리가 설명해줘야 할끼다. 다소 지루한 부분이 들어가도 어쩔 수 없제.”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회장은 으음, 하고 신음하며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부회장이 장난스럽게 키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이래 할까? 각자 연설문을 써서 가장 잘 된 사람 것을 채택하는기라. 잘 된 기준은 얼마나 재미있느냐. 어떻노?”

“노조미도 참. 도와주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도 되는데.”

아니아니아니아니, 회장, 저 눈을 보라고요. 저걸 완전히 장난감을 눈앞에 둔 어린애라고요. 회장이라는 이름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 생각에 들떠있다구요? 하지만 회장은 이런 내 생각은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순순히 부회장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말하는 게 내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연설문은 생각보다 쉽게 쓰였다. 약 20분. 나와 부회장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다 됐대이.”

“완성했어요.”

“두 사람 다 굉장히 빠르네…. 난 아직 절반도 못 채웠어.”

괜찮아요, 회장. 최종적으로는 아마 회장 게 채택될 걸요. 그러니까 정성을 담아 써주세요. 말하는 건 내가 아니라는 심정으로 반쯤 날림으로 썼더니 꽤 적당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그럼 나부터 발표!”

 

연설문

 

모두들, 학교생활엔 얼마나 적응했을까나? 나는 이 오토노키자카의 귀엽고 영리하다고 소문난 학생회장, 아야세 에리라고 해. 애정을 듬뿍 담아 영리하고 귀여운 에리치카라고 불러줘! 하라쇼!

 

“잠…, 귀, 귀엽고 현명하다니, 무슨 소리니, 노조미!”

“응? 난 에릿치가 예전에 할머니한테 영리하고 귀여운 에리치카, 라고 불렸다고 그러기에 고대로 쓴 건데?”

“NG야, NG! 안 돼! 모두의 앞에서 영리하고 귀여운 에리치카라고 스스로 말하다니, 부끄러워서 죽을 거야!”

어라, 그 부분입니까. 일단 내용 자체가 NG잖아요. 하지만 부끄러워하면서 화내는 회장이 신선한 모습이라 제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네요, 감사합니다, 부회장. 내 아이컨택트를 받고서 척,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뭐뭐, 그러지 말고 쫌만 더 들어보래이. 연설은 인사가 중요한 게 아니니께.”

“싫어!”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에리치…, 회장. 부회장은 내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여기까지구마.’하는 눈빛을 보냈다. 저는 딱히 별 내용은 없는데….

“그럼 제 차례네요.”

 

연설문

 

녹음이 싱그럽게 싹트기 시작하는 계절에, 어린 새싹들과 마찬가지로 부풀린 기대를 안고 여기까지 와주신 신입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토노키자카 학원의 학생회장, 아야세 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오토노키자카 학원이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그 전통 안에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배출되었다는 걸 아시는지요? 본 학원은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예술계열 전반에서 현재까지도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희 오토노키자카는 신입생 여러분의 어떠한 꿈도 응원하고, 전력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럼, 끝으로 제가 오토노키자카에서 갈고 닦은 노래와 춤 실력을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치카!

 

“치카!? 잠깐잠깐잠깐잠깐! 스톱, 에루 군.”

“네?”

회장은 어딘가 아픈 건지, 미간을 지그시 누르면서 내게 말했다.

“어째서 내가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

“그게, 오리엔테이션이라곤 해도 일단은 신입생 환영회니까 학생회 주최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에 그만….”

“춤추는 것 이외에도 많이 있잖니! 아니, 그것보다 신입생 환영회 날은 학생회 주최로 뭔가 안 해도 돼! 그 날은 각 부활동의 체험 입부가 있는 날이기도 해서, 학생회에서 준비하게 되면 각 부활동의 체험 입부 시간이 없어져버려.”

“으음, 그건 안 되겠네요.”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부회장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럼 아예 연설문을 없애고 춤을 추는 건 어때요, 부회장?”

“아! 그거 좋대이!”

“에엣!? 어디가 좋다는 거니! 전혀 좋지 않아! 인정할 수 없어. 기각이야!”

회장이 책상을 내려치며 일갈했지만, 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외치는 소리는 나와 부회장에겐 반대로 적절한 자극이 되었다. 살짝 화난 것 같지만, 내겐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소리치는 것으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부회장도 마찬가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상은 어쩌죠?”

“내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신입생 환영회의 노림수는 신입생이 아니대이. 미래의 오토노키자카 학생을 위해 오토노키자카가 얼마나 즐거운 학교인지를 보여주는 기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돌틱하게 하면….”

3초간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손을 올려 나와 부회장은 높이 하이터치를 했다. 짝! 상쾌한 소리가 울렸지만, 대조적으로 회장의 눈엔 제법 진심으로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적당히 안 하면…….”

“웃, 죄, 죄송합니다!”

“그래 화내지 말래이, 에릿치. 에릿치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린대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니아니, 의상이 어울리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다 안 카나? 에루 군도 그렇게 생각하제?”

이야기가 나한테 돌아왔다. 흐름도 다시 돌아왔다. 나는 부회장에게 살짝 웃어 보인 뒤, 바통을 이어받았다.

“물론이죠.”

척, 하고 나와 부회장은 동시에 일어나 악수를 나누었다.

“제 1회, 에릿치에게 어울리는 의상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본인을 놔두고 갑자기 뭘 시작하는 거야, 노조미!”

엥, 부회장, 표준어도 제대로 말할 줄 아는 겁니까!?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부회장은 자리에 앉아 어험 헛기침을 했다. 너무 놀란 탓에 잠깐 멍하니 있었나 보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대이.”

앗, 다시 돌아갔다! 옆에서 회장이 ‘두 사람 다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니?’ 라든가 ‘에리치카, 집에 돌아가고 싶어….’ 라는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와 부회장에게 있어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회장의 옷차림. 회장의 중얼거림 따윈 조용히 무시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장의 모델 같은 몸매는 솔직히 말하면 반칙이라고 생각해요.”

“흐음, 확실히. 에릿치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다면 그건 옷이 이상한 거지, 에릿치가 이상한 건 아니제. 그럼 전제는 모든 옷이 다 어울린다는 것으로 하고, 어떤 옷이 가장 어울리는지 공방을 주고받아 볼까?”

“지지 않아요.”

“무슨 이야기로 의욕을 불태우는 거야! 정말 두 사람 다… 그래, 그냥 마음대로 해…….”

번뜩, 부회장의 눈이 빛났다.

“간호사.”

“쿨럭!”

크윽, 내장기관을 당했나…. 회장의 간호사 모습을 상상했더니 심장이……. 나는 소매로 피로 얼룩진(*녹차입니다.) 입가를 닦고는 씨익 웃었다.

“역시 부회장. 회장에 대한 이해도가 타인 이상이군요. 이 토론을 하면서 회장의 코스프레 모습을 상상하는 건 당연지사. 그걸 노리고 전투력이 높은 복장을 커스텀 한 거겠죠.”

간호사인 회장. 분홍색의 간호사복을 입고, 검은색 스타킹을 신었다. 한 손에는 주사기, 한 손에는 서류를 챙기고는 어린 환자에게 싱긋 미소를 짓는다. ‘자, 주사 맞을 시간이란다. 상냥하게 해줄 테니 조금만 참으렴♡.’ 어린 환자는 회장의 미소에 넋이 나간 데다, 상냥하게 해준다는 말에 심쿵. ……하지만 나라고 지고 있을 순 없지.

“…교사.”

“커헉! 역시 에루 군. 최단시간에 학생회에 적응한 무서운 1학년! 에릿치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구마. 확실히,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에릿치는 요염한 매력이 있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에릿치의 매력을 100% 이해했다고 보긴….”

“선생님, 귀여워요. 엣,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하고 볼을 붉게 물들인 에리 선생님.”

“……알고 있었나.”

척, 검지손가락을 세우는 부회장.

“섹시함과 요염함 뒤에 숨겨진 귀여운 매력. 그것이야말로 에릿치의 매력!”

“어울리는 옷이라고 하면, 메이드복에 가터벨트도 빠뜨릴 수 없죠.”

“순애 쪽으로 생각하면 웨딩드레스도 있을 법 하제.”

“아, 그건 꽤 보고 싶네요.”

쿨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매력을 갖고 있는 회장에겐 전체적으로 푸른색과 순백색이 감도는 웨딩드레스가 어울리겠지. 치마는 차이나 드레스처럼 왼쪽 허벅지 쪽이 살짝 파여 있지만 이것을 야하다고 표현하는 건 언어도단.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는 레이스와, 파여 있는 치마를 따라 올라간 끝에 수려하게 피어 있는 한 송이의 장미꽃은 고고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치마 자체에 풍성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은 없지만, 회장의 매끄러운 바디라인을 꽉 조여 부각시켰다.

팔과 허리에는 금으로 된 꽃 악세사리가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하늘 거린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회장은 러시아인 혼혈. 바다 같은 눈동자와 화사한 금발이 반칙인 미인이다. 머리를 내린 침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동양풍도 좋지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른 오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 훨씬 어울린다.

머리에는 천사가 잠시 날개를 쉬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레이스 베일이 드리워져 있지만, 그것조차 회장의 얼굴을 가리진 못한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 사랑스러운 얼굴에, 더욱 예뻐 보이기 위한 옅은 화장을 했으니 얼굴을 가리는 건 오히려 손해겠지. 그리고 마지막 장식은 티아라. 너무 화려한 건 좋지 않다. 정적이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에메랄드 블루 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이 좋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괜히 가슴이 뛰었다.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결혼할 상대도 아닌데… 그야, 이런 사람이랑 평생을 함께 하면 좋겠단 생각은 든다만─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읏…, 회장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에루 군. 얼굴 빨개졌대이?”

“무, 무슨 소리에요, 부회장!”

“있잖아, 에릿치~. 에루 군이 에릿치랑 결혼하는 상상해서 얼굴이 빨개졌대이! 귀엽지 않나?”

“…─에루 군.”

될 대로 되란 듯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회장. 그 손가락 사이에서 낮은 언성이 흘러나온다. 찌릿, 하고 섬뜩한 기운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확실히 에루 군은 이 한 달간 학생회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만, 너무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니? 에루 군한테 있어 학생회 일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 않았다는 건 알겠지만, 선배를 놀릴 정도로 여유로운 건 에루 군의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이번에 놀린 건 내가 아니라 부회장인데… 아니, 그보다 놀린 적이 없는데요.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선배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음? 에루 군은 에릿치와 결혼하는 상상을 한 것뿐이대이?”

“웃…, 그, 그게 놀린다는 거야! 노조미도 정말, 장난이 심하다구!”

“후훗, 알긋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마침 시간도 적당하구 말이제.”

부회장의 말대로, 시곗바늘은 집합시간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별 거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자, 그럼 힘내서 가볼까!”

기운찬 목소리로 싱글벙글 웃는 부회장. 그에 반해 나와 회장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왠지 나도 부회장에게 놀림 받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연설문은 집에 가서 생각해야겠어….”

그래도 이 몇 분 사이에 가장 수척해진 건 회장이었다.

 

강당엔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방송부 사람 2명과, 2학년에 2명. 아마 1학년은 아직 반장을 뽑지 못해서 공지 전달을 하지 않은 거겠지. 그렇게 나와 부회장, 회장까지 포함한 7명. 뭐, 보통 학교에 비해선 엄청나게 적은 수지만, 강당을 세팅하기엔 좀 많지 않나 싶다. 정말로 딱히 할 게 없어 보이거든.

“다들 모여주어서 고마워.”

“2학년 두 사람이랑 에루 군은 청소 도와줄 수 있나?”

회장이 간단히 인사를 하고, 부회장이 지시를 내렸다. 나와 2학년 반장들은 청소, 방송부 사람들과 회장, 부회장은 무대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강당 청소라고 해봤자, 정말로 바닥엔 먼지밖에 없어 단순한 쓸기 작업이었다. 무대 쪽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이크를 체크하거나, 멀리서 보이는 거리를 재거나, 조명을 조정하는 등 바쁜 것 같다.

사람이 단순 노동을 하게 되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게 된다. 아니, 귀를 잘 기울이게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난 정말로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야? 2학년 선배들의 목소리가 문득 들린 거라구!

“우리, 정말로 폐교가 되는 걸까….”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애들이 힘내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호노카나 우미, 코토리쨩 말이야. 스쿨 아이돌을 한다고 들었는데. 분명 학생회도 다른 방면으로 힘내고 있을 거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가망이 없지. 앞으로 신입생도 없는 학교에서 스쿨 아이돌, 게다가 도쿄에서 지금 시작하면…. 폐교가 정식으로 결정되면 내년엔 3학년과, 2학년 뿐. 지금 있는 1학년은 역시 쓸쓸하겠지….”

“그 애들은 앞으로 쭈욱 후배가 없는 거니까….”

…심장을 긁는 느낌이라는 건 이런 걸까. 손톱을 세워 심장을 꾸욱 누르는 듯한 느낌. 2학년, 3학년보다도 이 상황에 가장 민감하고, 누구보다도 가장 아프게 받아들이는 건 1학년이다. 지금 그 사실이, 입을 통해 나온 진실이 가슴에 확 와 닿았다.

처음 여기에 입학하고, 내게 아무것도 없었던 때엔 솔직히 뭐 어떠냐는 식이었다.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하고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한 달, 코이즈미랑 호시조라와 만나 친구의 소중함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알았다.

내겐 별 일 아닌 일이, 다른 사람에겐 굉장히 큰일이고,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단 걸 코우사카 선배, 소노다 선배, 미나미 선배를 통해 배웠다.

학생회에 들어가 학교를 알아가면서, 이 오토노키자카의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학교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2학년 선배들의 말에 확신했다. 나도 이 학교가, 이 학교의 사람들이 정말로 좋아졌다는 걸. 그 사람들에게 쓸쓸한 기분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걸. 가슴 아픈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학교를 존속시키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 노력은 언젠가 꼭 보답 받는다고 말해주고 싶어.

……어떻게든 모두를 도와줄 방법은 없는 걸까.

“다들 수고했대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옆길로 새지 말구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한 대이?”

생각을 하면서 청소하다 보니, 어느새 다들 준비를 끝마친 것 같다. 회장은 모두에게 ‘고마워’하고 인사하며 강당의 문에서 도와준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고, 부회장은 마지막으로 빠뜨린 게 없나 검사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없나요?”

“응. 연설문은 에릿치가 준비해온다구 했으니 이젠 딱히 할 일은 없대이. 뭐, 내일 우린 뒤에서 서있기만 하면 되지만… 긴장 된다거나 하는 건 없제?”

“네, 괜찮아요.”

“그라믄 에루 군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그라. 가장 중요한 건 몸조리다 안 카나. 갑자기 아프거나 하는 일 없도록 오늘은 푹 쉬는 게 좋대이.”

그렇게 말하며 부회장은 내 등을 밀었다.

“에루 군도 수고했어.”

웃으며 나를 배웅해주는 회장. 역시 지친 기색을 다 숨길 순 없었지만, 어쨌든 준비를 마쳐 홀가분한 것처럼 보였다.

“아뇨, 별로 한 것도 없는 걸요. 수고는 회장과 부회장이 했죠.”

“얘도 참 겸손은!”

회장이 후훗, 하고 웃으며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왜 하필 이럴 때 아까 상상했던 회장의 웨딩드레스 차림이 생각나는 거냐고! …손 부드럽다.

“에루 군이 학생회에 들어와서 일이 훨씬 수월해졌어. 들어오라고 무리하게 부탁한 감이 있어서 사실 조금 미안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학생회에 잘 적응해줬고. 너무 적응해서 문제긴 하지만….”

“…아하하.”

나와 함께 쓴웃음을 짓는 회장. 죄송합니다, 조금은 자중할게요. 하지만 회장의 웃음은 이내 곧 상냥하게 변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었다.

“─그래도 들어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

“후후, 에릿치는 이래저래 에루 군에게 불평만 얘기하면서도 실은 있어줘서 고맙다고 쭉 생각했대이. 그리고 내도 마찬가지로, 에루 군한텐 감사하구 있구.”

“노조미! 그런 건 얘기하지 않아도 되잖니!”

“그런 거가? 내는 몰랐대이. 에릿치가 계속 고맙다고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단 것만 알고 있었는데?”

“…으흠. 에루 군도 이제 돌아가도 되니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렴.”

회장은 그렇게 말하곤 ‘노조미, 잠깐 괜찮니?’하며 부회장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과, 싱긋 웃는 그 모습은 상당히 진노하신 것처럼 보였는데… 부회장 괜찮으실까나. 걱정해봤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 정도다. 짝, 두 손을 마주쳐 부회장이 사라진 방향으로 합장을 한 뒤, 가방을 챙기고 강당을 나섰다.

 

Love Live!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렌지 빛깔을 머금은 구름들이 어슴푸레 떠다니고 있었다. 부활동을 하던 학생들도 대부분 가방을 챙겨 메고 교문을 나서고 있다. 하지만 수업이 다 끝나고 집에 갈 때보단 사람 수가 적은 건 사실. 황혼에 삼켜진 교정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

“μ‘s 퍼스트 라이브 합니다!”

조용하기 그지 없었─

“잘 부탁드립니다!”

─아주 조금 소란스러웠다.

교정으로 나가자, 코우사카 선배와 미나미 선배, 소노다 선배가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코우사카 선배와 미나미 선배는 제법 밝은 미소로 사근사근하게 나눠주는 반면, 소노다 선배는 한 사람에게조차 제대로 나누어주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구~.”

보다 못한 코우사카 선배가 소노다 선배를 면박했다.

“호노카는 가게 일을 도와서 익숙할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코토리쨩도 잘 하구 있다구.”

상냥한 미소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나누어주면 안 받을 수가 없지. 실로 미나미 선배의 전단지 나눠주는 스킬은 대단했다.

“자, 우미쨩도. 그거 다 나눠줄 때까지 그만두면 안 되니까~?”

코우사카 선배의 말에 소노다 선배가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 무리입니다!”

설마하니 그 착실한 소노다 선배의 입에서 ‘무리’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소노다 선배가 기계도 아니고, 완벽할 리가 없잖아. 소노다 선배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뭐, 추측하건대 대충 아침에 있었던 일의 연장선상이려나. 춤추라는 말을 듣고 안색이 나빠져 도망친 소노다 선배. 아무래도 남 앞에서 춤추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이돌로서는 완전히 실격이다. 그래서 코우사카 선배는 낯가림을 하는 소노다 선배를 위해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 거겠지.

소노다 선배의 낯가림을 고치는 겸 라이브 홍보까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소노다 선배의 낯가림이 쉽게 고쳐질 지는 의문이지만….

“우미쨩, 내가 계단 왕복 못한다고 할 때 뭐라고 했더라?”

“알겠습니다! 해보도록 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μ‘s 퍼스트 라이브 합니다!”

소노다 선배도 힘내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눈치 없는 일이겠고. 가볍게 인사만 하기로 할까.

“저기.”

“저기.”

코우사카 선배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동시에 옆에서 나와 똑같은 말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오, 지난번에 그 아이와 에루 군!”

“코이즈미?”

“에, 에루 군…? 어, 어라? 스쿨 아이돌 선배와 아는 사이?”

고개를 갸웃하는 코이즈미.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코우사카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응! 우리 학교에서 내 춤을 가장 먼저 봐줬어!”

코우사카 선배가 멋대로 보여준 거긴 하지만.

“내일 라이브 준비는 어때요?”

“응! 완벽 그 자체야!”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라나. 세 사람이 연습해온 모습을 신사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쭉 봐왔으니까. 불안한 거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확답할 수 있다. 걱정스러운 것과 불안한 마음은 다르다. 세 사람을 보면 걱정스럽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전혀 없다.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세 사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

“저어…, 라이브, 보러 갈게요.”

코이즈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코우사카 선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전단지를 나누어주던 미나미 선배와 소노다 선배도 코이즈미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와 주는 거야~?”

“그럼 한 장, 두 장이 아니라 이걸 전부…!”

“─우미쨩?”

홱, 하고 코우사카 선배가 째려보자, 소노다 선배는 프린트로 얼굴을 가리며 투정부리듯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요….”

소노다 선배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 웃지 말아 주세요!”

“죄, 송해요…. 아니, 그치만…, 제 멋대로 소노다 선배는 언제나 솔직한 태도나 언행을 하고, 일에 관해서는 차분하게 뭐든 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귀여운 면모도 보여주실 때가 있었네요.”

“귀, 엽…?! 무,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서, 선배를 놀리면 안 된다구요! 애초에 저는 귀엽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는 소노다 선배. 선배에게 귀엽다는 말은 금지어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미나미 선배가 순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곤 말했다.

“에? 우미쨩 귀여운데?”

아무것도 첨가 되지 않은 순도 100%의 본심. 그 말에 소노다 선배는 ‘윽…!’하면서 물러났다.

“파란색의 긴 머리는 예쁘구, 길게 뻗은 맨 다리는 모델 님 같구, 얼굴도 미인! 우미쨩에겐 여러 가지 옷을 입혀보고 싶어!”“

“코, 코토리….”

이상한 분위기가 피어오르자, 코우사카 선배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볼을 부풀리고는 그곳에 끼어들었다.

“우으, 두 사람 다~ 나도 우미쨩 갖고 놀래!”

“호노카쨩! 갖고 노는 게 아니라 옷을 입히는 거야!”

“둘 다 틀렸습니다! 정말이지….”

풉, 하고 결국엔 소노다 선배도 미나미 선배와 코우사카 선배와 함께 웃음을 지었다. 응. 역시 활기찬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

“저어, 선배. 내일 도와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리허설로 바쁘실 때, 홍보 하는 정도라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코우사카 선배가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정말 그래도 돼?!”

“고마워, 에루 군~!”

“학생회도 내일 바쁠 텐데, 괜찮나요?”

유일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어오는 소노다 선배. 그래도 어떤 축제든 준비하는 기간이 가장 바쁜 법이다. 신입생 환영회는 축제가 아니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라이브는 환영회가 끝난 뒤니까, 바쁜 일은 없을 테지.

“네, 괜찮아요. 맡겨주세요. 선배들도 내일 라이브가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응! 그럼 내일 보자!”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코이즈미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코이즈미가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우리 학교에도 스쿨 아이돌이 생기는 거네.”

감개 어린 목소리. 내일 있을 라이브를 생각하는 걸까? 얼굴은 벌써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뺨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엔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코이즈미만큼이나 라이브가 기대되었다.

“그러네.”

“…어떤 식의 라이브를 보여주는 걸까?”

“…저 세 사람이라면.”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고 끌어들이는 것보다도,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나아가는 듯한 퍼포먼스가 아닐까. 가사는 분명 소노다 선배가 썼으니, 화려한 것보다는 진솔함이 묻어나는, 그러면서 보는 사람에게 자신감과 열정을 불러 일으켜주는 스쿨 아이돌다운 곡을 들려줄 게 틀림없다.

“세 사람이라면?”

하지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코이즈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본 적은 없으니까 잘 모르겠네.”

“엣, 그, 그런….”

“그렇지만 분명, 어떤 스쿨 아이돌보다도 훨씬 스쿨 아이돌 같은 퍼포먼스일 거야.”

 

 

다음날, 신사에서 일과를 마치고 부회장과 함께 느긋이 학생회실로 향했다. 신입생 환영회 날은 수업이 없고, 일정은 밥을 먹고 난 뒤 1시부터 시작한다. 학생회는 일단 주최하는 측이기도 하니 11시에 미리 모여 마지막 체크를 하기로 했다.

“회장, 안녕하세요.”

“왔대이~.”

“두 사람 다 어서와. 밥은 먹었니?”

“아직이대이. 그보다 오자마자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는 거, 뭔가 부부 사이 같지 않노?”

“누, 누가 에루 군과 부부니!?”

“에루 군이라곤 한 마디도 안 했는디~?”

“웃…!”

학생회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볍게 만담을 시작하는 두 사람. 평소와 같은 흐름, 학생회는 오늘도 이상 없음, 이려나. 요즘 부회장은 나와 회장을 엮어서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 같다. 이제 난 익숙해져서 이런 장난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경지가 됐지만.

“어, 어쨌든! 우린 먼저 강당에 가서 체크하고 그 다음에 같이 밥 먹기로 하자.”

회장의 제안으로, 일단 강당에 가기로 한 우리 세 사람. 전반적인 체크는 어제 다 맞춰놓아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그 뒤는 방송부가 맡았기에 우리들은 무대에 올라 조명 위치와 마이크 테스트만 하고 바로 내려왔다. 아니, 한 가지 더. 선생님들의 지루한 연설을 선행으로 들었다. 그걸 다 듣고도 하품조차 하지 않는 회장이란….

나는 매점에서 사온 빵을 한 입 물며 말했다.

“이따 저 연설을 한 번 더 들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에루 군, 선생님들도 다~ 열심히 준비한거대이. 너무 그라믄 못써.”

“그러는 노조미도 선생님들 말씀하실 때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음? 기억에 없대이.”

여유로운 점심시간. 나와 회장, 부회장은 학생회실에서 밥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평소에도 가끔씩 이런 식으로 학생회실에서 모여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아직 학생회 일에 익숙해지지 않은 나를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익숙해진 지금도 이렇게 가끔 밥을 먹고 있다.

실은 학생회 일에 관련 없는 대화를 자주 나누곤 하지만, 이런 시간이 싫지는 않다. 아니, 확실히 말하자면 좋아한다. 혹시 가족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별 거 아닌 잡담으로 웃고, 떠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따뜻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것 같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회장, 부회장에겐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루 군! 에루 군? 무슨 일 있나?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안 카나?”

“조금 생각 중이었어요. 그보다 왜요?”

“저번에도 말했듯 우리가 널 강제로 학생회에 끌어들였잖니. 혹시 학생회에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에루 군은 어떤 부활동에 가입했을까, 궁금해서. 에루 군은 특기도 많으니까.”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부회장. 아니아니, 특기가 많다니 그건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까! 내가 가진 특기라고 해봐야…… 어라? 저 정말로 특기가 없는데요.

“죄송한데, 제 특기가 뭐죠?”

내가 반대로 물어보자 흔쾌히 대답하는 부회장과 회장.

“그야 많이 있제.”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점이나,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점이 뛰어나. 사람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있고. 후훗, 이렇게 보면 학생회에 가장 걸맞은 인재구나.”

내 특기(?)를 하나씩 꼽으며 웃는 회장. 나 스스로는 전혀 못 느꼈는데, 정말 저런 특기라면 학생회가 정답이었던 거네. 어쩐지 운명같이도 느껴지는 내 행보에 스스로도 슬쩍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부회장이 손가락을 흔들며 살짝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특기가 있다 안 카나, 에릿치. 에루 군은 천성적으로 바람둥이대이. 카사노바 부에 들어가믄 분명 톱이 될기다.”

“진지한 얼굴로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회장도 뭐라 말 좀 해주세요!”

애초에 사귀는 사람도 없는 내가 무슨 카사노바를 한다고. 저는 순수하고 순결한 몸입니다.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을 회장에게 보내자 회장은 으음, 하고 고민하더니 살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했어?!

“회, 회장?!”

“으음, 아하핫….”

나 뭔가 했었나? 카사노바라고 들을 만큼 많은 여자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후후, 왜 그런지 모르는 표정이구마. 머, 그건 에루 군이 뒤돌아보믄 알겄제. 자, 슬슬 밥 묵고 어여 가재이. 인제 20분바께 안 남았으니께.”

“엣, 왜인지 안 알려주시는 거예요?!”

“왜 그른지 알려주믄 여자 아이의 위신이 안 선대이. 그니께 비.밀.”

우후훗, 하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회장을 보는 부회장. 회장은 부회장의 시선을 무시하곤 말했다.

“자, 어서 밥먹고 가자, 에루 군.”

“네? 아, 네에….”

 

“이것으로 신입생 환영회를 마치겠습니다. 각 부활동에서 체험입부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흥미가 있다면 마음껏 견학해주세요.”

회장은 긴장한 기색도 없이 깔끔하게 연설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왔다. 나는 서 있기만 했는데도 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긴장했는데. 역시 회장은 대단하다. 이럴 때 모습은 너무 늠름해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보고 있단 말이지…. 정말로 존경스럽다.

“회장, 수고하셨어요.”

“수고했대이, 에릿치.”

“평소처럼 한 것뿐인 걸. 후우, 일단락은 지었으니 당분간 학생회 업무로 바쁘진 않을 거야. 앞으로 있을 큰 이벤트라고 하면, 오픈 캠퍼스와 체육대회, 문화제 같은 거려나.”

“바쁘진 않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오픈 캠퍼스나 체육대회, 문화제는 신입생 환영회랑은 스케일이 다르다. 학생회 소관이긴 하지만 학교 전체에서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학생회만으로는 힘이 부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각 반의 대표를 뽑아 회의를 거치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정해진 내용은 결국 서류로 학생회에 돌아오기 때문에 학생회만으로 끝낼 수 있는 행사보다도 더욱 바빠지기 마련이다.

그런 즉, 이걸 바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회장님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겁니까.

“아니아니, 아직 날짜는 한참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정말로 안 바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놓으렴, 에루 군.”

“따, 딱히 걱정한 게 아니라….”

어쩐지 내가 학생회 일하기 귀찮아서 물어본 것처럼 됐잖아! 아니라구! 정말로 학생회 일에 보람이 느낀다구요? 아, 어서 오픈 캠퍼스, 체육대회, 문화제가 왔으면 좋겠다.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학생회 일을 잔뜩 하고 싶구나~.

“인제 오늘은 쪼금 느긋하게 굴어도 되겄제. 차라도 마실까?”

학생회실에 돌아온 뒤, 편하게 의자에 앉으며 부회장이 말했다.

“녹차랑 홍차가 있어요.”

“내는 녹차로 부탁한대이.”

“회장은요?”

“나는 홍차로 부탁할게.”

학생회에 들어오고 나서 두 사람에게 많은 걸 배웠고, 많은 걸 알았지만 설마 차를 타는 법을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최근엔 차를 타는 것에 요령이 생겼다. 많이 탄 것도 한 몫을 했지만, 내가 재미를 붙인 덕도 있을 것이다. 찻잎이 떨어지면 다른 종류를 써보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두 사람은 눈치 챌 낌새를 보여주진 않는다. 뭐, 맛있게 마셔주니 그걸로 됐나.

“인자 우얄기가?”

후루룩, 내가 타준 차를 마시면서 부회장이 물어왔다. 회장은 창가에 서서 바깥에 정신이 팔린 건지, 혹은 생각에 잠긴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신경 쓰여?”

부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회장이 반응을 했다.

“…노조미.”

“내는 돌아갈까나? 자, 에루 군도.”

“네? 아, 네…. 그럼 회장, 먼저 가볼게요.”

학생회실을 나올 때까지 쭉 회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을 닫고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루 군도, 그 분위기에선 말 꺼내기 힘들었제? 라이브 도와주러 가는 거.”

“알고 계셨네요…. 회장은 지금 μ's를 언짢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부회장, 돌아가시는 거 아니죠?”

“후훗, 글쎄. 어떨까나?”

부회장도 나 못지않게 μ's를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부회장이라면 분명 보러 오겠지. 회장에겐 돌아간다고 말했으니 어딘가에 숨어서라도 보는 걸까.

뭐, 일단 저는 저대로 움직여볼게요, 부회장.

“그럼 나중에.”

“그래~.”

달리고 달려서 강당에 도착하자 코우사카 선배, 미나미 선배, 소노다 선배는 벌써 의상을 차려입고 준비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선배들.”

“앗, 에루 군이다. 마침 리허설을 하려고 했거든. 한 번 봐줄래?”

“본방의 즐거움으로 남겨둘게요. 아직 시간 조금 남았죠? 저, 홍보하고 올게요.”

“그럼 그래줄래? 고마워~!”

팔을 흔드는 코우사카 선배와 미나미 선배, 소노다 선배를 뒤로 하고 강당을 나왔다. 한 아름 전단지를 안고 교정으로 나가자 아직 여러 부에서 권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으음, 조금 힘드려나. 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잠시 후 4시부터 스쿨아이돌 μ‘s의 퍼스트 라이브가 시작됩니다! 관람 하실 분은 서둘러주세요!”

억지로라도 전단지를 들이밀며 홍보를 시작했다. 강경하게 나간 탓인지 다들 전단지를 받아주기는 한다만, 어째 표정이 조금 무서워하는 듯한… 아니, 어째서 오토노키에 남자가 있냐는 듯한… 이봐, 거기 수군대지 말라구! 자, 잠깐만 어째서 날 보면서 전화를 하는 겁니까? 어라 방금 경찰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저,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고요….”

“꺄악! 겨, 경찰 아저씨, 빨리요!”

“웃, 아, 아니라구~~!!”

절규를 하며 도망치는 판국이 되어버린 저였습니다. 아니, 진짜로 심각했다. 정말로 경찰이 온 바람에 오토노키자카를 한 바퀴 빙 돈 뒤에 겨우 오해를 풀었다니까…. 그 와중에 전단지를 다 나눠주고 다닌 난 정말….

벤치에 앉아 일단 한숨을 돌리고 휴대폰을 보았다. ……4시 5분? 엥? 시간을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휴대폰의 디지털시계는 4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잠깐 기다려봐. 난 분명 3시 20분경에 나왔다고. 분명 전단지를 제대로 나눠준 시간은 5분 정도였을 거고, 그 다음은 10분 동안 도망(치는 겸 전단지 전부 배포). …나머지는 전부 사정정취인가.

“…이거 빨리 안 가면 끝나버리겠는걸.”

혹시라도 라이브가 끝났을까봐 초조해하면서 강당으로 달렸다. 막무가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전단지를 받아주었다. 분명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와줬을 것이다.

지금쯤 많은 사람들을 향해 코우사카 선배가 활기찬 웃음으로 인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미나미 선배는 여전히 긴장감 없는 미소를 띠우고 있지 않을까. 소노다 선배는 떨지 않고 잘 하고 계실까. 이런 저런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당의 입구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기 직전,

─어째서 강당 안이 이렇게 조용한 거지?

위화감이 스쳐지나갔다. 이미 라이브는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강당 안에서는 라이브가 한창일 텐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아직 시작하기 전이라면 코우사카 선배가 오프닝 멘트를 할 것이고, 라이브가 이미 끝났다면 관객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설마설마 싶어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강당의 문을 열어 틈 사이로 안을 훔쳐보았다.

─이럴 리가…….

절망적일 정도의 배신감이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 넓은 강당에는, 코우사카 선배들을 도와준 클래스메이트 세 사람과, 무대 위에서 귀여운 의상을 차려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코우사카 선배들만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단지를 받아갔는데, 어떻게 한 사람도……. 아니…. 이럴 때 조차 짜증나리만큼 냉정한 내 머리는 이것이 당연한 결과라고 내게 속삭였다. 그게 더욱 화가 났다.

대중들의 인식은 보통 그렇다. 스쿨 아이돌은 조잡하고, 완성되지 않았으며, 웬만한 궤도에 오르지 않는 스쿨 아이돌이 아닌 이상에야 볼 가치가 없다고. 진짜 아이돌조차 처음 데뷔할 땐 자기 발품을 팔아 홍보하고, 어렵게 라이브 원정을 뛰기도 한다.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데뷔한 아이돌이 말이다. 그 라이브도 몇 명이 와줄까, 말까한데 고작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만든 스쿨 아이돌이, 진짜 아이돌에 못 미치는 춤과 노래 실력을 보인다.

그런 라이브에 누가 와주기나 할까.

─그리고. 이딴 생각이나 하는 내 대가리는 대체 뭐냐고!

힘껏 머리를 들어 벽에 부딪쳤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아프다. 정말 죽을 만큼 아프지만, 이런 건 지금 코우사카 선배들이 겪고 있는 아픔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에루 군.”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상냥한 목소리에 힘이 풀린 난 그대로 주저앉으며 말했다.

“부회장… 코우사카 선배, 울고 있었어요. 어떤 일이든 활기차게 하고, 미소가 어울리고, 전혀 눈물이란 게 없을 것 같던 그 코우사카 선배가요. 대체… 노력이란 건 뭘까요? 왜 전력으로 힘내는 사람들이 이런 절망을 맛봐야 하는 거죠? 머리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래선 노력해도 의미가 없잖아요! 학교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데, 조금쯤은 관심을 가져도 괜찮잖아요! 노력한 사람이 울게 되는 건…, 노력한 결과가 절망이라면 차라리….”

천천히 나를 일으키는 부회장. 그리곤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 내 이마에 붙여주었다. 부회장의 손이 닿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부회장은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내 머리를 감싸 품으로 끌어오더니, 그 따뜻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력한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맛보는 절망은 노력한 사람들만의 것이대이. 저 눈물은 언젠가 그 사람의 양식이 될기다. 의미 없는 노력 따윈 이 세상에 없대이.”

부회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대편 복도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코이즈미?

순간 잘못 본 줄 알았지만, 활짝 열린 반대편 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확신했다.

“어, 어라…? 라이브는? 어라? 어라…?”

“……하자. 노래하자, 전력으로!”

“호노카….”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 오늘까지 노력해왔으니까! 노래하자!”

“호노카쨩, 우미쨩….”

절망을 딛고 일어선 코우사카 선배. 그리고 소노다 선배와 미나미 선배의 목소리.

아직까지 나를 쓰다듬고 있는 부회장에게 이제 괜찮다는 눈짓을 보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후훗, 설마.”

능글맞은 부회장의 웃음. 정말이지 부회장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니까….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부회장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는 에릿치한티 집 간다고 말했다 안 카나.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 텡께 갔다 오래이.”

고개를 끄덕이고, 강당의 문에 손을 뻗었다. 문을 열자 조명이 꺼지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초, 1초, 선율이 나비처럼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귀를 자극한다. 소노다 선배, 미나미 선배, 그리고 코우사카 선배에게 차례로 라이트가 비춰지고 귀여운 모습에 넋을 잃는다.

시각도, 청각도 전부 저 무대 위에 서 있는 3명의 아이돌에게 빼앗긴 채.

 

그대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I Say… Hey! Hey! Hey! START:DASH! Hey! Hey! Hey! START:DASH!

갓 태어난 아기 새들도 언젠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거야

커다랗고 강한 날개로 날아가지

포기해선 안 돼. 그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너도 느끼고 있을 거야, 시작의 고동소리를

내일이여, 변해라!

희망으로 변해라!

눈부신 빛에 비춰지면서 변해라!

 

START!

 

슬픔에 갇혀서 울고 있기만 할 네가 아니야

뜨거운 가슴이 분명 미래를 열어나갈 거야

슬픔에 갇혀서 울고 있기만 해선 시시하잖아

너와 (너와) 너의 (꿈의) 힘 (지금을) 움직일 수 있는 힘

믿고 있는 걸… 그러니까 START!!

 

Hey! Hey! Hey! START:DASH! Hey! Hey! Hey! START:DASH!

비가 개고 난 뒤의 기분으로 높아지는 기대의 속에서

좌절했던 일조차도 전부 추억으로 삼자

내일이 피어나네!

희망이 피어나네!

즐거운 멜로디가 입가에 맴돌아 피었어!

 

DASH!!

 

기쁨을 받아들이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방황하던 미로에서 겨우 밖으로 빠져나온 거야

기쁨을 받아들이고, 너와 나는 앞으로 나아가겠지

그것은 (그것은) 아득한 (꿈의) 조각 (하지만) 사랑스러운 조각

저 편으로… 나는 DASH!!

 

세 사람의 손이 한 데로 모아지고, 그 위로 새하얀 빛의 입자가 눈처럼 아름답게 내려앉았다. 양옆에 켜진 스포트라이트가 차분하게 세 사람을 비췄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내겐 아득하니 실루엣만이 보였다. 그러나 이 광경은, 내가 지금껏 본 어떤 무대보다도 더없이 아름다웠고,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두근거렸으며, 언제까지고 이 스쿨 아이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이 밝아지고,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갈채를 보냈다. 아주 조금이지만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코이즈미와 호시조라. 코우사카 선배의 친구 분들과, 이 노래를 작곡한 니시키노까지.

무대 위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얼굴엔 아까까지 보였던 눈물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그 얼굴은 이미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뜨거운 갈채는 계속되지 않았다.

강당의 맨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질적인 발소리. 강당을 떠도는 뜨거운 열기가 냉기가 실린 발걸음에 서서히 식어갔다. 갈채는 이미 멈추었고, 강당의 분위기는 벌써 꽉 붙잡힌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학생회장님.”

먼저 입을 연 것은 코우사카 선배 쪽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코우사카 선배를 쏘아붙이는 회장. 회장의 올곧으면서도 살벌한 눈동자는 코우사카 선배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코우사카 선배는 회장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계속 하겠어요.”

“호노카….”

“어째서? 이 이상 계속하더라도 의미가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데.”

그야말로 정론. 아이돌이 데뷔에 성공하는 것은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끈기. 그리고 실패에 굴하지 않고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건,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부터 간절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때 노력을 하게 된다.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준다. 몇 번을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는 끈기를 준다.

하고 싶다는 마음 이상의 절망에 마주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고 만다.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꺾인 마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일으킬 수 있다. …코우사카 선배들을 보고 알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지금 저는 좀 더 노래하고 싶다고,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우미쨩도, 코토리쨩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 도전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이 기분을 믿고 싶어. 이대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응원 같은 건 전혀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들이 어쨌든 노력해서 전하고 싶어!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 마음을!

언젠가…. 언젠가 우리들이 반드시 이 강당을 가득 채워 보이겠어요!”

발걸음을 돌려, 조용히 이 강당을 빠져나왔다. 강당의 문 옆에는 부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운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후훗, 완패로부터의 스타트인가….”

“부회장의 말대로 이 세상엔 의미 없는 노력 따윈 없을 지도 모르겠네요.”

코우사카 선배들이, 이 라이브가, 내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앞으로 나아갈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역시 스쿨 아이돌은 대단하다…. 남을 이런 기분으로 만들 수 있는 직업은 어떤 것도 아닌 스쿨 아이돌뿐일 테니까.

귀가하기 시작한 부회장의 옆을 따라 걸으며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강당 밖으로 나오자 세상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중충한 공기로 감싸여 있던 세상에 구멍이 뚫려,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게 된 듯한…. 그래서인지 아까 보았던 이 노을 진 하늘이 이상하게도 환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