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데몬 4호니까.
언니는 제게 해선 안 될 일들을 알려주었어요. 저를 스스로 지키는 방법과, 어느 정도의 교양. 쿠로사와 가의 새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엄격한 부모님과 세상의 시선들로부터 제 모습을 숨기는 법을 알려주었어요.
울보 루비는, 언니 덕분에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어요.
마루는 제게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었어요. 친구를 사귀는 법이나, 친구들과 함께 어떤 일을 하면 즐거운지. 친구의 경계를 넘어서, 기쁨과 슬픔. 여러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방법과 친구의 손을 잡는 방법. 그리고 일어서서 함께 나아가는 방법. 제 행복만을 바라는 그 아이는, 제가 그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걸 알고 있을까요?
헤헤, 분명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친이니까.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고 유일한 행복이 스쿨 아이돌을 보는 것뿐이었던 루비는 좀 더 여러 가지 행복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두 사람 다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 아끼고, 사랑해준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어요. 그렇지만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 다른 형태가 있다는 걸 그 아이를 만나고 깨달았어요.
츠시마 요시코 쨩. 세상이나 주변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를 타천사라고 부르면서, 지옥이라든가, 불운이라든가, 마력 같은 어려운 말을 많이 하고. 정말로 여러 불운들이 겹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꿋꿋하게 일어서서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후훗, 이 정도의 불운으로 요하네 님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하고 힘차게 말하고. 혼자서 행복을 잡는 방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고.
울보 루비. 소극적인 성격의 루비와는 정반대의 귀여운 소녀에게 어딘가 이끌려버리는 건 운명 같은 것이었을 지도 몰라요.
자신이 경험했을 때 재미있던 일들. 친구가 그걸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기뻤던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소중하게 여기는 형태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손을 꼭 잡고, 곁에서 지켜주는 것만이 아니라.
손을 꼭 잡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는 것.
요시코 쨩은 언제나 저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어주었어요. 해선 안 되는 짓을 잔뜩 알려주고. 둘만의 비밀도 잔뜩 쌓고. 정말로 요시코 쨩의 리틀 데몬이 되어버린 루비였어요.
굉장히 행복했어요.
요시코 쨩이 잡아준 손이나.
넘어졌을 때 붙여준 반창고.
요시코 쨩의 집에 놀러가 몰래 밤새 게임을 하기도 하고.
야식을 먹고.
TV를 보고.
인터넷 방송 데뷔에.
그… 여자끼리 나오는 야한 책도 봐버렸어요. …요시코 쨩은 화냈지만요.
쿠로사와 가의 루비로서는 하면 안 될 것들을 잔뜩 배웠어요. 분명 언니에게 혼날 테지만, 가볍게 주의를 받을만한 행동들뿐이었어요. 이 정도는 해도 심하게 혼나지 않을 만한,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한 세계.
거기서 루비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까지 배워버리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루비는 알고 있었어요. 요시코 쨩이 더 잘 보이게 된 리틀 데몬으로서 이 감정만큼은 분명, 가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너무나도 신선하면서도 낯설어서─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처럼 순수함으로 뭉친 깨끗한 결정이지만, 손끝에 닿으면 쉽게 바스러질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이라 루비는 간단히 다가서지 못하는 거예요.
루비가 욕심을 부려 손을 뻗으면, 그 순간 산산조각 나버릴 감정은, 배워선 안 되는 거였어요.
요시코 쨩과 친구가 되고, 리틀 데몬이 되어 가르쳐준 것들은 전부 행복으로 가득했어요. 즐거움으로 가득했어요. 하지만 뜻하지 않게 알게 된 그 감정은, 어째선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거였어요.
지금까지 모든 행복을 덮어버릴 정도로 아팠어요. 요시코 쨩을 알게 된 걸 후회하는 감정과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 해서 행복했었던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 속안에 소용돌이 쳐 결국 루비도 잘 모르게 되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어요.
“…루비로는 안 되는 걸까.”
*
새하얗게 눈이 내려오는 겨울. 12월 25일, 크리스마스도 이제 곧 끝나가는 시점에, 저희 집을 찾아온 건 요시코 쨩이었어요.
“당신은…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어, 언니…! 그, 루, 루비가 잠깐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미안해…….”
“……알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짧게 얘기하세요, 루비, 요시코.”
요시코 쨩을 맞아준 언니는 그렇게 말하곤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걱정 되어 하는 말인 건 알고 있으니까, 혼나는 게 힘들진 않아요. 그 정도는 제가 혼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지금 얼굴색이 안 좋은 요시코 쨩이 언니에게 혼나면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미안해, 언니. 루비, 조금 거짓말해버렸어.
“고마워, 루비.”
힘겹게 웃으며 털썩, 계단에 주저앉은 요시코 쨩. 요 근래 눈이 안 왔다고는 하나 상당히 차가울 텐데… 루비가 그 곁에 같이 앉자 예상대로 몸서리칠 정도의 차가운 냉기가 온 몸을 엄습해왔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마음을 싸늘하게 만드는 건, 요시코 쨩의 지금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어요.
“요시코 쨩, 무슨 일 있어?”
“…나, 리리가 좋아.”
리리. 요시코 쨩이 리코 선배를 부르는 애칭이에요. 네에, 알고 있었어요. 요시코 쨩과 친해져서. 리틀 데몬 4호가 되어, 요시코 쨩을 보게 되었을 때, 이 아이가 얼마나 리코 선배를 좋아하는지.
매일 눈으로 쫓고 있었어요.
아침인사를 하려고 벽에다 연습하는 모습도 봤어요.
리코 선배가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오는 날이면 언제나 같이 가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어요. 말 그대로 뼈에 사무칠 정도로 잘 알게 되었어요.
새삼 이렇게 말로 하니 조금 말의 무게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요시코 쨩은 말을 더 이어나갔어요.
“그래서, 오늘 눈이 오면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그야 일기예보도 눈이 올 확률 90%이상이라고 했고. 오늘만큼은 불운이 요하네를 비껴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어떤 불운이 요시코 쨩을 덮쳐 와도 방긋 웃었는데.
“오늘은 쭉 우치우라에서 기다렸는데, 눈은 고사하고 하늘엔 구름 한 점도 없고. 평소에도 싫어하는 태양이, 자꾸만 요하네를 비추는 것도 싫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는데.
“눈 같은 건 전부 지옥에나 떨어지라구!”
지금은 이렇게. 갸름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땅으로 떨어지면 부서져버릴 것 같이 약한 존재처럼 보여요.
다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요시코 쨩의 미소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루비?”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슬쩍, 집게손가락으로 요시코 쨩의 슬픔을 걷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대신 훔쳐냈어요.
“루비는 리틀 데몬 4호니까, 알고 있어.”
“에?”
“요시코 쨩에 대한 것, 전부 알고 있어. 뭐든 알고 있어.”
“…루비.”
휴대폰 액정을 밝히자 디지털시계가 마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응, 이걸로 충분할 거야, 요시코 쨩.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포기하지 말고 리코 선배의 집 앞으로 가, 요시코 쨩.”
“…지금부터 가도 눈은 오지 않는 걸. 분명 무리야…….”
“믿어줘. 세상에서 제일 불운한 타천사 요하네의 최고 심복, 리틀 데몬 4호인 쿠로사와 루비를 믿어줘. 내가 곁에 있다면, 요시코… 요하네 쨩의 불운은 행복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
천천히 루비의 눈을 바라보던 요시코 쨩은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평소와 같은 소악마적인 미소를 지으며 타천 피스로 발개진 눈가를 가렸습니다.
“…그래. 지옥의 사자들 중에서도 천계에서 그 운을 그대로 가지고 타락한 전 엔젤, 리틀 데몬 4호 루비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오랜 시간 세상을 속박해왔던 위대한 신들의 운명도 리틀 데몬 4호 루비의 행운이라면 뒤집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곤 요시코 쨩은 뒤를 돌아 똑바로. 똑바로, 리코 선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라그나뢰크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겠어!”
슝.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요시코 쨩의 모습이 저 멀리 흐려지면서 사라져갔어요. 분명, 이걸로 잘 된 거예요.
루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루비의 눈앞으로 새하얀 눈송이가 조심스레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어요.
두 손을 모은 채 뻗자, 그 위로 또 다른 눈송이가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품고 있던 하늘은 어느새 회색의 구름 뒤로 얼굴을 숨기고 있었어요.
아아, 역시.
요시코 쨩의 말을 들었을 때 분명 눈이 올 거라 생각했어요. 루비도 리틀 데몬 4호니까. 타천사 요하네의 불운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니까. 지금 루비의 가장 큰 불운은 요시코 쨩이 리코 선배와 이어지는 거라 생각한 하늘이 분명 눈을 내리게 해줄 거라고 믿었어요. 으음, 아마도 요시코 쨩이 상심하는 불운보다도, 요시코 쨩과 리코 선배가 이어져서 루비가 상심하는 불운이 훨씬 더 컸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아마 신님께서는 이것까진 몰랐을 거예요.
루비에게는, 요시코 쨩이 미소를 잃는 것만큼 싫은 일은 없다는 걸 말이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제 아픔도 상관없다는 걸 말이에요.
“루비, 요시코. 아직도 밖에… 루비? 혹시 울고 있는 건가요?”
“…에헤헤. 겨우 눈이 와줬으니까…, 너무 기쁜 바람에…….”
“…루비도 차암. 자, 어서 들어가요. 또 금방 추워질 거예요.”
“응, 언니.”
타천사 요하네 님의 행복이야말로, 리틀 데몬 4호의 행복이란 걸 말이에요.
요시코 쨩. 나, 훌륭한 리틀 데몬이 되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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