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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 해커스 메모리 진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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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가 카미시로 엔터프라이즈에 취직을 성공하여 후디에에서 빠지게 되었다. 원래부터 레전드 멤버로서 활약했던 류지의 해킹 능력은 EDEN을 유지, 보수하기에 적합했던 모양이다. 해커들이 해킹 관련 능력을 살려 여러 회사에 취직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데 이는 해커들 사이에서는 완성된 해커라고 불리며 이때 팀을 나가는 건 배신 같은 행위가 아니라 졸업이라고 하는 듯 했다.

 

축하 파티에서 류지가 한 턱 내는 고기와 음료를 즐기고는 잔뜩 취한 류지, 치토세 두 사람을 유우와 각자 집에 데려다 준 뒤로 나는 후디에로 돌아왔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철컥.

 

열쇠로 문을 열자 빛 하나 들지 않는 건물 구조 탓에 시야가 확 깜깜해졌다. 손을 더듬어 불을 켠 뒤 문을 닫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쳤다. 그러고는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자주 이용하던 부스가 아닌, 창고를 향하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방인데. 예전부터 쭉 창고로 써 왔던 방이고 몇 번이고 들락날락거린 기억이 있는데. 그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오늘만 갑자기 눈물이 나온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내라고 내 발이 날 여기로 이끈 건지도 모른다.

 

아까 후디에를 나가기 직전에 느꼈던 기묘한 감각. 마치 내 뺨을 한 순간 어루만지고는 스쳐지나갔던그런 이상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귀신? 아니면 예전부터 전해져온 구전에, 정이 든 물건에 깃든다는 영혼 같은 걸까. 후디에(나비)의 영혼이라. 그건 필시 아름답겠지. 귀여운 구석도 있고. 가끔은 난폭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도 장난스러운 날갯짓으로 나를 당황시킬지도 모른다.

 

생긴 건 글쎄. 후디에의 간판을 맡고 있는 그 건방진 꼬마 요정? . 기왕이면 귀여운 여자 아이가 좋겠는데. 감청색의 긴 머리카락에, 후디에의 코트를 걸치고 또유우만큼이나 해킹을 잘하는 그런.

 

. 또다.

 

영문도 모르고 눈물이 나왔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매일 후디에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생겼다.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는눈물샘의 고장?! 아까부터 느껴진 기묘한 감각은 눈물샘이 민감해져서 대기 중의 미세한 전기 자극을 받은 거라든가!

 

……. 그럼 내일 병원을 가보도록 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창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익숙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

 

홱 뒤를 돌아보니 중고 컴퓨터의 화면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농담이지? 여긴 전기도 연결 안 되어 있는데. 잠시 망설였지만 곧 디지바이스를 착용했다. 사건이라면 해결해야 한다. 디지바이스에 컴퓨터가 연결되고 후디에의 메인 화면이 눈앞에 보였다. 깜빡이고 있는 BBS 탭을 누르니 이런 밤중에 의뢰가 한 건 도착해있었다.

 

…….”

 

나는 의뢰인과 의뢰 내용을 살핀 뒤 곧바로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렇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주실 줄 몰랐어요. 당신은 늦은 밤에도 일을 하시는 군요. 역시 EDEN의 수호자, 뱅가드라고 불러야 할까요. EDEN의 최고 해커인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밤을 새야할 지도 모르니 내일 낮에 다시 만나는 걸로 해도 괜찮을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양해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럼 내일 EDEN의 카미시로 엔터프라이즈에서.

 

그녀와의 전화를 끊고 디지바이스 기동을 멈추었다. 그러자 전원이 차단된 것처럼 불이 켜져 있던 중고 컴퓨터의 화면이 갑자기 꺼졌다. 혹시 몰라서 자세히 조사했지만 역시나 전기라든가 배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 의뢰만을 위해 잠깐 켜졌던 건가. 후디에(나비)가 이 의뢰를 꼭 받으라고 말해준 것만 같았다.

 

 


1

 

안녕하세요. 이제 다 모였네요.”

 

, 너도 왔구나? 좋았어! 이 멤버로 어떻게든 해내서 꼭! 아구몬과 파피몬을 다시 만날 거야! 우오오오옷, 기다려줘! 아구몬! 파피몬!”

 

정말이지 시끄럽네. 그나저나 댁까지 불려온 건가. , 댁까지 합류한 이 정도 전력이라면 도전 안 하는 것도 아깝지.”

 

. 전에 이터를 직접 해킹해서 들어왔던 그 아이의 옆에 있던 애구나. 과연. 직접적인 기억은 잃어버렸을지 몰라도 그 때의 경험과 감각. 그리고 감정은 여전히 오래 전에 붙은 습관처럼 존재할 거야. 이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는걸.”

 

후후, 이런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나를 껴주다니 영광이군. 예전 내가 의식이 없을 동안 나를 대신해주었던 인격체와 대화를 나눌 기회 같은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것도 조수 군이 있어준 덕분이다.”

 

면식이 있는 멤버가 있는가 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멤버가 있었다. 리벨리온즈의 노키아와 쥬드의 전 리더 사나다 아라타. 종종 카미시로의 대표자로 의뢰를 하기도 하면 어느 때는 함께 밥을 먹는 사이인 유코. 전뇌 탐정님은 알고 있었지만 유코와 닮은 남자와 붉은 머리를 한 여자는 모르겠다. 어째선지 유코를 닮은 남자 쪽은 나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럼 멤버도 모였으니 의뢰 내용을 설명할게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에게 사과를 하게 해주세요.”

 

……?”

 

고개를 갸웃하자 유코가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아니, 유코만이 아니라 노키아와 사나다. 유코를 닮은 남자와 빨강머리의 여자아이 다섯 명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그런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아요.”

 

현실에 남아서 이곳과 EDEN을 지켜준 댁에게 미안한 짓을 했어.”

 

정말로 미안했어! 어떻게 사과를 해도 모자랄 정도야.”

 

…….”

 

그렇게 말해도. 이터 EDEN? 세계를 구하다니? 무슨 얘기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모두. 그가 사과를 받으려면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야하는 게 전제이지 않겠나.”

 

탐정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다섯 명을 일으켜 세운 뒤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무얼.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나도 일반인 신분이다. 내가 이해한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마.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사전 지식은 필수이기도 하고. 내 설명의 부족한 부분은 이 녀석들이 채워줄 거다.”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그댄 세계라는 존재가 단 하나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나?”

 

…….”

 

세계.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지금 이 현실과 전뇌 공간인 EDEN. 다른 세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후후, 걱정하지 마라. 그게 평범한 거니까. 흔히 이세계라고 부르는 다른 세계의 존재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확립되어 있지. 다만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 다섯 명은 정말로 다른 세계를 확인해버렸다. 아주 어릴 적에 말이야. 그곳은 디지털 월드라고 불리는, 전뇌 공간이 현실 그 자체인 공간이었다.”

 

전뇌 공간이 현실.

 

그래. 해커인 네가 가면 꿈만 같은 공간일지도 모르겠군. 어렸던 그들은 그 꿈만 같은 공간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지. 그 작은 사념이 어떤 고차원적인 존재. 데이터를 수집하며 세계를 기록하는 존재에게 주입되었다. 이윽고는 한 괴물이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이터. 이터는 다섯 명의 아이 중 한 명 유고를 먹어치우고 포식이라는 걸 익히고 말았다.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말았지.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 돌아갔지만 디지털 월드에는 이터가 증식하고 데이터로 되어 있는 그 공간의 모든 걸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완전히 동화나 소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다섯 명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거라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뭘까. 완전히 제 3자인 모양인데.

 

뭐어,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거라. 디지털 월드에는 디지몬이라는 엄연한 주민들이 있었고, 그들은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 디지털 월드를 지키던 신과 기사들은 화가 났고, 이 일의 모든 원흉인 인간을 없애자고 생각하여 차원의 문을 열게 된다. 그렇게 디지몬들에 의해 현실 세계 또한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지. 여기서 너희 팀 후디에가 수면 아래에서 움직여 전뇌 공간과 현실 세계를 지키고, 우리들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현실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붕괴되고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지. 그래서 생각한 방법은 다른 시간축의 세계선을 합치는 것이었다.”

 

다른 세계? 디지털 월드와는 또 다른 세계인 건가요?

 

. 헷갈릴 수도 있겠군. 흔히 평행우주, 혹은 패러렐 월드라고 불리는 이론을 그댄 알고 있나?”

 

패러렐 월드라면 잡학지식으로 유우한테 들은 적이 있다. 유우한테 들었던가? 기억이 흐릿하지만 설명은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세계에서 선택하지 않은 일들을 선택한 내가 있는 세계. 말하자면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세계려나.

 

. 우리가 사는 세계를 A , 디지털 월드는 A-1 이라고 하자. 이 둘은 같은 시간 선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리고 패러렐 월드, 또 다른 네가 사는 세계는 B가 된다. 아예 다른 세계. 어쩌면 그대가 해커가 아닌 세계일지도 모르고, 그대가 여자인 세계일지도 모르는 그런 세계인 셈이다. 그래서 아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B세계를 지금 우리가 있는 A세계와 합치게 되었고 그 안에서 기억이 상황과 정황에 알맞게 개편되었다.

 

디지몬들을 처음부터 만나지 않은 세계. 이 다섯 명이 디지털 월드로 가지 않은 세계. 어떤 인간이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은 세계가 되었고. 죽은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있는 게 되었으며, 적이었던 인간이 가족이나 동료가 되어 있는 그런 세계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기억이 개편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지. 이 다섯 명을 제외하고 말이야. 물론 나도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이 다섯 명이 제게 사과해야하는 일이라는 건 뭐죠?

 

그 부분은 직접 얘기를 듣는 게 좋겠군.”

 

댁은 기억 못 할 테지만. 후디에의 팀에는 댁 친구가 아니라 다른 1명이 있었어. 류지의 동생이자 천재 해커.”

 

그 아이의 마지막 전투를 스에도에게 들었다. 그도 그 아이가 디지몬과 합체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야. 원래라면 너와 함께 현실로 돌아갔겠지. 그렇게 기억이 개편된 채로, 그 아이의 운명대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우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디지몬이 되었고 우리 다섯 명이 한 일은 어쨌든 간접적으로나마 너희들의 삶에 영향을 준 거니까. 이걸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어. 스에도가 우리에게 그걸 전한 이유도 그런 이유일 거고.”

 

…….”

 

왜 류지의 동생이면서 자신을 불렀냐는 표정이네. 만약 류지가 기억을 찾게 되면 두 사람은 지금의 행복한 현실과 불행했던 과거에 괴리를 느끼고 정신이 불안정해질 수 있어. 그 녀석들의 주위는 많이 바뀌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댁이 적임이라고 할 수 있지. 좋은 의미로 댁 주위는 바뀐 게 많이 없었거든. 가정환경이라든가, 걸어온 길이라든가, 사건이라든가. 댁은 후디에에 들어와서 크게 바뀌었다지? 좋은 팀이니까. 댁이 쌓아온 인연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 엔딩으로 끝내게 둘 순 없었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구차한 변명은 안 해. 구한 세계에 친구가 없다면 그딴 세계 나부터 사양할 테니까.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연결해보이겠어. 나를 위해. 동료를 위해. 댁을 위해 말이야. 우리의 속죄를 받아줬으면 해.”

 

후디에가류지와 치토세와 나. 그리고 유우가 아닌 류지의 동생으로 이루어져 있던 팀? 아니, 그럴 리가. 후디에를 만든 건만들자고 한 건, ………누구? , 토세. 어째서? !

 

뇌가 흐릿하게만 기억하고 있던 부분의 모순을 정확히 캐치하기 시작했군. 처음엔 나도 같은 증상이었다만, 저건 꽤 아프다. 보통 사람은 금방 미쳐버릴 거야. 그대, 정신을 잃지 마라. 무리하게 생각해내려 하지 마. 인간의 기억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전해지지. 우리와 함께 나아가다보면 문득 떠오르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진정해라. 천천히 호흡을 내쉬어라.”

 

스읍, 하아. 탐정님의 차분한 말에 호흡을 가다듬은 뒤.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그래. 의뢰다, 의뢰. 나는 여기에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온 게 아니라 의뢰를 하러 왔다. 의뢰의 보상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라면. 의뢰를 끝내고 저절로 받게 되는 거라면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의뢰에 집중하자.

 


 

2

 

“8년 전의 일이 없었던 게 되었다면 디지털 월드는 아직열린 적이 없을 뿐 존재는 한다는 이론이에요. 아직 만나지 않았다는 건 이제부터 만날 수 있다는 것. 과거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아요. 그곳에 존재할 이터가 우리의 사념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디지털 월드에 존재하는 디지몬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루트를 타겠어요. 당신에게 부탁할 의뢰의 내용을 다시 확인할게요. 지금부터 저희는 EDEN의 서버 데이터를 이용해 하나의 공간을 만들 거예요. 물론 사전에 EDEN 자체를 점검할 거라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공지는 해놨어요. 당신은 이 EDEN에 존재하면서도 쓸모가 없어져 용량을 차지하는 정크 서버의 데이터를 찾아 만드는 공간으로 옮겨주시면 돼요. 보수는 돈. 그리고당신이 잃어버린 기억(해커스 메모리)이에요.”

 

허거거거거걱?! 디지털 세계에 갈 수 없다면 이쪽에서 만든다니 유콧치 엄청 천재잖아!? 나는? 나는 뭘 할까?”

 

, , 그게노키아 씨는 그다른 분들이 지치지 않도록 응원을.”

 

물론이지! 이 에로귀염보디로 모두를 불끈불끈하게 만들어버릴 거야!”

 

불끈불끈하게 만들지 말라고. 네 뇌는 온통 꽃밭이냐?”

 

하아?! 좀 잘 생기면 여자도 많이 만나봤다는 거야? 내 에로귀염보디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야!?”

 

시꺼! 그냥 힘내라고 하라고!”

 

그럼 모두, 시작할게요!”

 

방금 전까지 장난을 치다가도 시작한다는 신호 한 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바뀌었다. 진지한 얼굴로 기도를 하고 있는 노키아. 화면을 띄워놓고 활발하게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는 남은 인원들. 서버는 순식간에 구축되어 갔다. 내가 데이터를 옮겨놓으면 사나다와 빨강머리, 유고와 유코가 가시화를 시키고 탐정님이 디테일을 움직였다. 장장 10시간이 넘는 대 해킹. 전원이 신경을 곤두세운 가운데, 갑작스레 아바타에 노이즈가 낀 듯 일렁였다.

 

……!?”

 

이거전뇌공간 안에서 뇌를 필요 이상으로 혹사시키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한 게?

 

, EDEN에서 10시간동안 뇌를 혹사 시켜서 그런 건가. 가상공간 하나 만드는 데 이렇게 애먹다니! 진짜 세계를 만들어버린 스에도 녀석은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그렇지만 여기서 그만뒀다간 전부 물거품이 돼! 전원 딱 죽기 직전까지만 버텨!”

 

그 사람은 원래부터 천재였어. 자신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마더 이터를 통해 최대한으로 늘렸으니까. 마더 이터에 더 오랫동안 있던 나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어. 그나저나 죽기 직전까지라난 한 번 겪어봤으니 할 수 있을 지도.”

 

그 농담 재미없어요. 그리고 오빠는 마더 이터의 제어와 먹힌 인간의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썼는걸요. 그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이 있어요. 오빠도 충분히 대단해요.”

 

조수 군. 지쳤는가? 후후, 조금만 더 힘내라. 무사히 돌아간다면 그대의 신작 커피 만들기에 협력하지. 물론 마시진 않겠지만 말이다.”

 

, , 앗키노의 러브 파워 잔뜩 넣은 먹을 것과 음료수야!! 파이팅, 파이팅, 오오오오오오!!”

 

곁눈질로 그들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저런 식으로 류지와치토세와. …….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고. 화내다가. 짜증내고. 울었던그 때 내 곁에 있던 건…….

 

열렸다!!!!”

 

누군가가 외쳤다. 서버의 저 멀리, 지퍼를 내린 듯한 자그마한 틈이 열리고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젠장, 이래서야 유년기 디지몬정도밖엔 못 넘어와! 유고!”

 

, 아주 약간의 틈인데도 서버가 디지털 세계화 되고 있어. 이래선 불안정한 우리 전뇌체에도 영향이 갈지 몰라. 안정시키는 게 먼저야.”

 

데이터를 더 빌려올 서버는 없는 건가!!”

 

이런 때에 언제나 내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건.

 

문득, 정말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얌전해 보이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귀여운 하드웨어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후디에의 코트를 대충 어깨에 걸쳐놓은.

 

에리카.

 

입술이 달싹이며 기억 속에도 없는 이름을 되뇌었다.

 

순간. 틈에서 아주 작은 푸른색의 나비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갯짓으로 우아하게, 나를 향해 그대로 날아왔다.

 

……바보.”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감청색의 머리카락. 호박색을 띤 아름다운 눈동자. 삐진 듯 뚱한 입술은.

 

기억났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안았다. 예전, 옥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작아져만 가는 에리카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 안 컸구나?

 

……메메땅.”

 

……?

 

이따가 메메땅으로 혼내줄 거니까.”

 

에리카는 그렇게 말한 뒤 힘껏 나를 밀쳤다. 화려하게 바닥에 나뒹군 나를 대신해 그녀가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도울게. 이곳에 디지털 월드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네. 틈은 그대로도 괜찮아. 서버 용량은그러네. 조금 더 확보 가능해. 내가 할게.”

 

천재 해커. 이미 디지몬 자체가 되어 서버에 기억을 저장할 필요도, 연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뇌에 부담이 가지 않는 에리카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에리카의 합류로 구축하던 디지털 세계 서버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고 우리들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3

 

안정된 디지털 세계 서버의 틈에서는 작고 귀여운 디지몬들이 하나, 둘 호기심을 품고 틈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아마 디지털 세계가 열리면서 내 기억들이 네게 흘러들어간 모양이야. 그 전기 자극을 통해 넌 곧바로 날 기억해낸 거고.”

 

그렇구나. 라고 이해한 척 했지만 사실 원리 같은 건 어찌 되든 좋았다. 지금까지 에리카를 잊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화나기도 했다. 이런 내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리카가 살짝 내 코를 잡아당겼다.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에리카 생각 하고 있었는데?

 

그건 알아.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괜찮아. 내가 마지막에 네게 한 말도 기억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리카의 인격 데이터와 추추몬이 합체해 후디에몬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기적도 일어난다고. 내가 말한 기적은 내가 후디에몬이 된 게 아니야. 내가 후디에몬이 되어, 디지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 열린 무한한 가능성.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 시간부로 태어난 거야.”

 

그녀는 예전에도 본 적이 없는, 마음이 한껏 담긴 미소를 짓곤 말했다.

 

, 믿고 있었어. 그래서 안심하고 신생 뱅가드와 여행도 잔뜩 즐겼고. 그거 알아? 디지털 세계는 현실 세계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01로 이루어진 바다라든가, 그 세계에 전혀 필요 없는 물건들도 있고.”

 

재잘거리는 에리카를 다시 한 번 끌어안는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힘을 줘서. 답답할 테지만 에리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내 목에 양 팔을 걸어 끌어안았다.

 

언제든 만날 수 있어. 너와의 추억을. 기억들을 또 다시 함께 쌓아가자.”

 

입술에 느껴진 감촉은 전뇌공간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따뜻했다.